pray 간청하다

간절한 마음의 부탁

pray 간청하다
Photo by Sincerely Media / Unsplash

비블로스에서 pray는 종교 의식인 '기도'가 아니라 간청이다. 절박한 필요를 직접 전달하는 실제적 행위이며, 이를 예식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원어의 본래 의미를 가리는 오역이다.

내가 당신에게 간청하니, 당신은 나의 여동생이라 말하시오: 그리하면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무사하고, 내 혼이 당신 때문에 살 것이오.(겐 4:3)
Say, I pray thee, thou art my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and my soul shall live because of thee.

낱말 설명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필수 중의 필수인 기도가 비블로스 진리로 재조명해보니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어 테필라, 팔랄, 그리스어 프로슈케 등이 영어 프래이어(prayer)로 번역된 것을 한글로 기도(祈禱)라 번역한 것인데, 의미상으론 대동소이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의 경우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부탁하는 ‘간청’의 의미입니다. 반면에 한글의 기도는 빌기(祈)자 빌도(禱)자로서 빌고 또 빈다는 뜻입니다. 의미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종교적인 의식으로서의 기도라는 데 있습니다.

일반적인 간청과는 달리 기도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합장) 행하는 하나의 종교의식입니다. 한국의 토속종교인 무속신앙과 불교신앙 등에서 종교의식으로 행하던 기도를 한글 번역자들이 기독교에 도입하였고, 가장 중요한 성경 낱말의 하나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종교의식으로서의 기도가 바빌론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알과의 영적 소통을 위해 두 눈을 감고 합장하여 기도하곤 하는데, 바알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다양한 손 싸인들(hand symbols)을 사용합니다. 이같은 기도 행태가 바빌론 포로 이후 유다교(Judaism)에 성행하였고, 이슬람교와 힌두교, 불교 등에도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 로마 카톨릭교(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안에도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작은 뜸씨 하나가 몰래 들어와 전체를 뜨게 한 것입니다(코첫 5:6).

비블로스 용례를 자세히 살펴 보면, 종교의식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생명현상으로서의 간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블로스에서 첫언급된 겐 12:13의 pray라는 낱말부터 간청하다이며, 이것을 기도하다로 번역하면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상이 사람이든 엘로힘이든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엘로힘과 소통하기 위해 굳이 눈을 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신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눈을 뜨고 그분 계시는 곳을 바라보며 간청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손 모양도 특정 심볼로 할 이유가 전혀 없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든 땅바닥에 펼치든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하면 됩니다. 큰 소리로 외치든 들리지 않게 속삭이든 마음속으로 간청하든, 의사소통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다 알아들으시거든요.

엘로힘과의 소통에 따로 종교의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대화하고 호흡할 수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 없이도 얼마든지 대화하고 호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계신다고 믿으면 그냥 대화하면 됩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와 대화하듯 대화할 수 있고, 함께 동행하며 호흡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대화이고 간청은 간청입니다. 평소에 자유로이 대화하다가, 절박하고 간절한 필요가 생기면 간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간청(prayer)을 기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의식인 기도는 오히려 엘로힘과의 소통에 방해가 됩니다. 종교의식은 가식과 위선이라서 그분께서 싫어하십니다. 긴 기도나 주문 외우듯 하는 중언부언 기도를 그분께서 혐오하십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지배권주께서 간청하신 방식에 따라서 간청하라는 것인데도, 주문 외우듯 암송하고 반복하는 행위는 자칫 바빌론 종교의 전통을 답습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생존현상과 생명현상으로서의 간청을 종교의식으로서의 기도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의 종교의식인 기도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령 기독교의 새벽기도, 식사기도, 주기도문, 묵도, 성호경, 묵주기도 등이나, 불교의 합장, 삼배, 백팔배, 염불 등이나, 이슬람교의 살라트, 두아, 염주기도인 타스비흐 등이나, 그밖에 힌두교의 옴(만트라) 등과 비교해 보아도, 종교의식인 기도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이제는 바른 비블로스로 재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낡은 기독교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진리의 비블로스로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기도의 진실을 알면 기독교가 비블로스 진리에서 떠나 이교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슬픈 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요 8:32) 비블로스 말씀 그대로입니다. 진리를 안 사람들은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앞에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굳이 눈 감고 합장하여 기도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식으로서의 기도를 멈추십시오. 진리의 자유 안에서 창조주이신 엘로힘과 자유롭게 대화하십시오. 눈을 뜨고 깨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십시오.

무소부재하시다고 믿고 실제로 내 앞에 계신다고 믿으면,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끊임없이 간청할 수 있으며, 그분과 함께 숨 쉬며 동행할 수 있습니다.

엘로힘과 무려 300년 동안이나 동행한 에녹이 그랬듯이(겐 5:22-24), 이제 우리 밥티스마 성도들도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