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왕역본과 최종권위

제임스왕역본과 최종권위
Photo by Humble Lamb / Unsplash

88 서울 올림픽과 함께 한국 땅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비블로스를 살펴 지키기 위한 기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聖經)과 바이블(Bible)의 바른 이름이 비블로스(Biblos)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안티오키아(안디옥) 크리스토스인(크리스천)들이 전해준 안티오키아 비블로스가 한국땅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번역한 성경들만 있었고, 대표적으로 개역한글성경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988년 12월 20일 그리스어 수용원문(Received Text, Textus Receptus, TR)에서 직역한 새성경(사복음서)이 처음 출간될 때 밝힌 명분은 이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원본을 손상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승 보존해온 전통 원문들은 다수 필사본, 비잔틴원문, 수용원문(TR) 등으로 부른다. 독일의 루터성경, 영어의 제임스왕역본(King James Version) 등이 이 원문에서 번역한 것들이다.”

1991년 8월 16일 도서출판 안티오크에서 최종권위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한국 땅에서 성경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문서 사역의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기존 개역성경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성경의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창조주의 말씀들을 기록하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비블로스(성경, 바이블)입니다. 창조주의 말씀기록은 인간의 어록이나 저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이므로 ‘최종권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최종권위란 ‘최종 단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정·종결하는 권한’ 또는 ‘최종 결정에 대한 공식적 권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제임스왕역본을 권위역(the Authorized Version, AV)이라 칭하는데, 여기서의 권위가 과연 최종권위인가의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사본학(textual criticism, 본문비평학)은 말합니다: “최초의 원본(original text)은 소실되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은 무수히 많다. 신약사본만 5,800여 개, 번역사본은 18,000여개, 도합 25,000여 개의 사본이 남아 있다. 사본의 진위여부와 신뢰성 판단은 전적으로 학자들의 몫이다. 비평을 거친 히브리어, 그리스어 사본들은 원본의 영감성 범주에 해당하지만, 번역본들은 영감성을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번역본에 불과한 제임스왕역본을 최종권위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에 대해 제임스왕역본(KJV) 진영은 꾸준히 반론을 제기해왔습니다. “1%의 소수사본으로 99%의 다수사본을 뒤엎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약사본 5,800여 개 중 99%가 서로 일치하면서 제임스왕역본을 지지한다. 바티칸 사본과 시내사본은 단 1%에 불과한 소수사본인데다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비평학자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기에 오히려 비평가치가 있다는 억지논리를 펼치고 있다. 실제로 제임스왕역본은 대중으로부터 가장 큰 신뢰를 받아왔다. 창조주께서 인정해주셨다는 산 증거다.”

최종권위 논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최종권위의 개념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양극단으로 치우치면서 본질을 놓친다는 데 있습니다. 최종권위(Final Authority)란 원래 비블로스(성경, 바이블)에 없는 말입니다. 원본주의(originalism)와 제임스왕역본이 충돌하면서 최종권위 논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국의 세대주의자로서 독립침례교회 목사인 피터 럭크만은 그리스어 수용원문(TR)보다 영어 제임스왕역본이 더 정확하고 권위 있다고 주장하면서 제임스왕역본을 최종권위라 불렀습니다. 왜 원본은 최종권위가 아니고, 외려 제임스왕역본이 최종권위인지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최종권위의 개념조차 모호하여, 이해력이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최종권위란 땅의 권력들 중 누가 최종 위치에 있는지 따지는 개념입니다. 하늘에 속한 절대권력은 최종을 따질 수 없고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창조주의 말씀은 하늘에 속한 절대권력입니다. 다만 그 말씀이 언어에 담아 주어졌기에,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수는 있겠으나, 따질 필요나 이유가 있는지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가 최종권위냐 영어가 최종권위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어는 단지 그릇일 뿐인데, 그릇의 우열과 관계 없이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용물이 절대권력의 말씀이고, 그릇은 불완전한 언어일 뿐이며, 완전한 말씀과 불완전한 언어가 하나 되어 완전한 비블로스를 이루는 것이 엘로힘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언어를 가지고 누가 최종권위인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용물인 말씀은 완전하고 불변하지만, 담는 그릇인 언어는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달합니다. 불변의 말씀과 변화하는 언어가 합하여 완전한 비블로스가 된다는 사실은 엘로힘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성육신의 신비와 같습니다. 완전하신 창조주께서 불완전한 육신을 입고 오신(성육신하신) 분이 예수스(Jesus)이십니다. 비록 불완전한 육신을 입고 오셨어도 여전히 완전한 엘로힘이시듯이, 비블로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말씀을 불완전한 언어에 담았어도 여전히 완전한 말씀기록입니다. 이것은 엘로힘다움의 신비(the mystery of godliness)입니다(팀첫 3:16).

신비란 세속적 이성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신비도, 비블로스의 신비도 그러합니다. 기독교가 세속 학문에 오염되면서 성육신의 신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속 학문에 오염된 사본학과 문서설이 비블로스의 신비를 부정하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크리스토스인(크리스천)들은 깨어서 분별해야 합니다. 비블로스의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자체는 절대권위이고 당연히 최종권위도 됩니다. 땅을 심판하는 진리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어는 최종권위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가 최종권위냐 영어가 최종권위냐를 따질 수 없고, 수용원문이냐 제임스왕역본이냐를 따질 수 없는 것은, 둘 다 언어이고 언어는 계속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말씀을 잘 담아내기만 한다면, 영어 제임스왕역본보다 더 정확한 한글 번역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제임스왕역본이 최종권위라는 주장은 무색하게 될 것입니다. 지배권주 예수스의 재림 전까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재림 직전 마지막 비블로스 언어가 영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살펴지키라는 지상명령은 여전히 유효하고, 민족들과 언어들 간의 비블로스 경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모든 사본학 논쟁과 성경논쟁의 뿌리는 영감설의 오류입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성경이고, 성경의 기초는 영감설이라는 절대구도가 전 세계 기독교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가 무너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진실입니다. 영감설은 오류입니다. 영감설(靈感說)이란, 성경이 절대무오류한 것은 영의 계시를 직접 받은 최초 원본과, 원본과 일치하는 필사본들이며, 번역본들은 영감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사본학자들은 영감설을 지지합니다. 영감설의 결론이 사본학자들의 전문성과 권위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본학자들은 최초 원본의 영감성을 가설로 제시한 다음, 지금은 소실되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지구상에 남은 사본들은 필사 과정의 실수들도 있고, 신앙심으로 첨가한 것도 있으니, 사본학자들의 비평을 거쳐 최초 원본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본학자들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들이 인정한 소수사본(바티칸 사본, 시내사본)과 거기에서 번역한 현대역본들이 전 세계 기독교에 널리 보급된 것이었습니다.

사본학자들의 논리의 헛점은 영감설에 언어영역을 포함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최초의 원본이니, 사본이니, 번역본이니 따지는 것 자체가 언어영역입니다. 말씀 자체는 신앙의 영역이므로 비평대상이 될 수 없고, 말씀을 담은 언어는 얼마든지 비평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감설을 앞에 내세우면서, 막상 영감의 대상인 말씀은 뒤로 감추고, 영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언어를 가지고 고도의 비평을 가하여 마치 최고의 성경전문가인양 행세를 하여 인류를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블로스의 진실을 확인해 보면 사본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영감설의 근거 구절을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비블로스 기록 전체는 엘로힘의 숨주입에 의하여 주어졌고, 교리를 위하여, 책망을 위하여, 교정을 위하여, 의 안의 교육을 위하여, 유익하니: 그것은 엘로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들에 철저히 구비되어, 완전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티모데오스 둘째서신 3:16,17)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2Timothy 3:16,17)

비블로스 기록 전체(All scripture)란 하나의 비블로스의 모든(전체) 기록이란 뜻이지, 모든 종류의 성경이란 뜻이 결코 아닙니다. 동사가 단수(is)인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을 ‘모든 성경은’이라 번역하면 명백한 오류입니다. 개역한글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글 번역본들이 이 실수를 답습하였습니다. 심지어 말씀보존학회의 한글킹제임스역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의 흠정역도 ‘모든 성경은’이라 번역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비블로스 기록 전체는 엘로힘의 숨주입으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숨주입(inspiration)을 영감으로 번역한 것이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영감이란 오해 때문에 영감설이 생겨났고, 영감설 때문에 사본학을 비롯한 온갖 성경논쟁들이 유발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성경이고, 성경의 기초가 영감설이라는 이 공식 때문에 비블로스의 신비가 철저히 가려졌습니다. 따라서 이 낱말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영어 인스퍼레이션(inspiration)은 영(spirit)을 넣었다(in)가 아니라, 숨(breath)을 넣었다(in)입니다. 그리스어 프뉴스토스의 원형 프네오(pneo)는 숨을 쎄게 불다(breathe hard)를 뜻합니다. 제임스왕역본 비블로스에서 인스퍼레이션이 두 번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사용된 것 외에 또 한 번은 욥 32:8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전능자의 숨주입(inspiration)이 사람들에게 이해력을 주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인스퍼레이션의 히브리어는 네샤마(neshama)로서 숨을 불어넣다를 뜻합니다. 게네시스 2:7에서 사람의 콧구멍 속으로 불어넣은 숨이 바로 네샤마입니다. 그리스어 프네오와 히브리어 네샤마는 같은 낱말, 같은 뜻으로서, 영이 아니라 숨입니다. 따라서 영과 혼이 함께 호흡하는 신비의 책이 비블로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과 영이 소통하고, 혼과 혼이 소통함으로써, 읽는 사람이 이해하였고, 그 이해한 것을 사람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 비블로스라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영감(inspiration)이란 낱말은 비블로스에 두 번 나오지만(욥 32:8; 팀둘 3:16), 두 번 다 숨주입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영감을 숨주입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비블로스 기록 전체는 영과 혼이 만나 기록되고, 바른 이해력(understanding)이 주어지는 것 역시 영과 혼이 만나야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따로 분리된 거룩한 책 성경이 아니라,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숨 쉬는 책 비블로스입니다. 영의 진리가 혼의 언어와 만나 비블로스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영과 영의 소통이 있고, 혼과 혼의 소통이 있습니다. 영의 계시가 있고, 영의 분별이 있습니다. 동시에 혼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혼의 이해력이 뒤따릅니다. 혼의 이해는 혼의 언어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이해된 것을 언어로 표현하여 기록합니다. 엘로힘의 영과 인간의 영이 호흡하고, 엘로힘의 혼과 인간의 혼이 호흡하면서 비블로스가 기록되고 완성됩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여 불완전할지라도, 그 언어에 담긴 완전한 말씀과 하나 되어 완전한 비블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블로스의 신비이며 엘로힘의 신비입니다.

불완전한 비블로스가 사람을 완전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완전한 말씀과 불완전한 언어가 하나 되어 완전한 비블로스를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비블로스의 신비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데 있고,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진실은 어디까지나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