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ly 엘로힘다운

엘로힘다운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godly 엘로힘다운
Photo by Marco Angelo / Unsplash

엘로힘다운 성품은 종교적 노력인 경건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엘로힘 가족의 본질이다. 엘로힘다운 근심만이 참된 회개와 구원을 이루며, 아담의 옛 생명에서 비롯된 세상 근심은 결국 죽음에 이를 뿐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경건한 자가 아닌 엘로힘다운 사람이 비블로스 성취의 주역이 된다.

엘로힘다운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그러나 세상 근심은 죽음을 이룹니다.(코둘 7:10)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낱말 설명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 없듯이 인간이 엘로힘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경건해져도 어디까지나 경건한 사람일 뿐 엘로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엘로힘이 되어야 엘로힘다워질 수 있으므로, 엘로힘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 것이 바로 엘로힘다움의 신비입니다.

요안네스 희소식 10장 35절은 밝힙니다: 엘로힘의 말씀이 온 자들을, 그분께서 엘로힘들이라 부르셨고, 비블로스 기록은 깨뜨릴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비블로스 말씀 속에 있는 엘로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주입되면 그 새생명으로 인간이 새로 태어나서 엘로힘들이 되어서 마침내 엘로힘 가족에 속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인간이 엘로힘들(gods)이 된다는 전제 하에 엘로힘다운(godly) 이란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한(devout)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경건(devotion)이란 아담의 옛생명을 도덕적으로 무장한 종교적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유다교와 기독교와 세계의 종교들이 경건을 추구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엘로힘다움(godliness)이란 크리스토스의 새생명에 기초한 성품으로서 경건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영어 godly도 [god, 엘로힘 + ly, like, 다운, 답게]로 구성되므로 엘로힘다운(답게)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실제로 경건한(devout)이란 낱말은 비블로스에서 엘로힘다운(godly)과는 다른 개념,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뤀 2:25; 활 2:5; 8:2; 10:2,7; 13:50; 17:4,17; 22:12).

따라서 엘로힘다운 근심(godly sorrow)은 엘로힘의 새생명에서 나온 근심으로서, 아담의 옛생명에서 나온 근심과는 다른 종류,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시들의 비블로스 12장에서 다비드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엘로힘다운 사람이 끊어지고 있고; 믿쁨찬 자들이 사람들의 자녀들 가운데 없어집니다.”

마지막 때, 결론의 시간에, 경건한 사람들은 많아도 엘로힘다운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경건한 사람들이 아닌 엘로힘다운 사람들의 몫입니다.

다비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당신께서 그 말씀들을 지키실 것이니, 오 주님, 당신께서 그 말씀들을 이 생명세대부터 영원하도록 보존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