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믿쁨
믿음인가 믿쁨인가
믿쁨은 인간의 신념인 '믿음'과 달리, 엘로힘의 생명에서 난 선물로 '믿음'과 '미쁨'이 결합된 상태이다. 순수한 엘성 안에서 이 믿쁨의 신비를 붙드는 자만이 비블로스 진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참된 밥티스마 성도가 될 수 있다.
은혜에 의하여 여러분이 믿쁨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그 믿쁨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엘로힘의 선물이며: (엪 2:8)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낱말 설명
인간 자신에게서 난 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신조(belief) 같은, 믿음(believing)이지만, 믿쁨(faith)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엘로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타락 이후 인간의 신뢰성은 크게 무너졌습니다. 인간 자체를 믿기가 어려워졌고, 인간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조차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배신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믿다’(believe)란 동사의 명사형은 ‘믿음’(believing)이라는 동명사이거나 ‘신조’(belief)란 명사인데, ‘믿는 동작(행위)’ 자체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 ‘faith’란 명사도 ‘믿음’이라 번역하는데, 정확히 하자면 ‘믿쁨’이라 해야 맞습니다. ‘미쁘다’(faithful)란 형용사의 명사형이 ‘faith’이기 때문입니다. 형용사의 명사형이라면 ‘미쁨’이라 해야 하지만, ‘믿다’란 동사의 개념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기에 “믿음 + 미쁨”인 ‘믿쁨’이라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믿음(believing or belief)과 믿쁨(faith)을 동일시하여 모두 ‘믿음’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는데,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르듯이 창조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다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명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생명이지만, 거룩하신 창조주의 생명은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생명입니다.
인간이 ‘믿는다’(believe)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바탕을 둔 개념입니다. 즉 인간의 생명에서 믿음 혹은 신조가 나왔다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생명의 표현인데, 그 생명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명인 것입니다.
반면에 ‘믿쁨’(faith)은 원래 창조주의 생명에 바탕을 둔 개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명을 ‘미쁘다’(faithful)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의 생명이 미쁜 생명이고, 그 생명을 믿는 믿음이 믿쁨(faith)인 것입니다.
흔히들 이러한 구분 없이 ‘faith’를 ‘믿음’(believing)과 혼용하는데, 그러다가 배신의 뒤통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미쁨의 생명이 아니라 배신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으로 믿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신조일 뿐이지만, 창조주의 생명으로 믿는 것은 새 생명에서 난 믿쁨뿐입니다.
진리의 책인 비블로스라면 ‘믿음’과 ‘믿쁨’을 구분해야 마땅합니다. 당신의 손에 든 책이 성경이든 성서이든 바이블이든 간에 이 구분이 정확히 되어 있는지 꼭 확인해 보십시오. 정확히 되어 있지 않다면 감히 진리의 책 비블로스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쁨의 신비란 무엇입니까?
비블로스에서 신비(mystery)란 비밀(secret)이 아닌 비법(knowhow)입니다. 엘로힘께서 정해놓으신 비법이라서 아무나 알 수 없기에 자칫 비밀로 오해하곤 합니다. 비법은 알 수 있는 것이고 비밀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엘로힘의 비법을 한자로 신비(神秘)로 번역하였기에 마치 인간이 알 수 없는 비밀로 착각하지만, 실은 엘로힘이 정해놓은 비법이므로 특정조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신비입니다. 그 특정조건은 다름아닌 ‘믿쁨’입니다.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믿으면(believing), 말씀 속의 새생명이 그에게 주입되어 믿쁨이 생깁니다. 새생명에서 난 믿쁨이기에 더 이상 배신하지 않고, 영원히 신뢰를 지속하는 독특한 속성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본능을 인간이성은 식별하고, 엘성이 응답하면서 밥티스마를 받아 확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남(born again)이고, 진정한 의미의 구원(salvation)입니다.
진정한 밥티스마 성도만이 순수한 엘성(conscience, 양심) 안에서 믿쁨의 신비를 붙들 수 있습니다(팀첫 3:9). 믿쁨의 비법을 알게 되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비법을 사용하게 되며, 그 결과 믿쁨의 열매들을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가령 경제활동에 있어서,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방식에 따라서 자본주의 논리로 경제활동을 하였지만, 구원받고 밥티스마 성도가 된 이후에는 비블로스기록에 따라서 청지기로서 달라진 경제활동을 하게 될 것이며, 확실히 달라진 삶의 열매들을 증거할 것입니다.
세상을 따르지 않고 비블로스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비블로스의 정확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비블로스가 숨의 책인 만큼 비블로스 숨과 나의 숨이 소통되어야 하며, 거기서 나온 진리의 빛에 따라서 삶의 방향과 방식, 가치관, 원칙, 새로운 목표 등이 정립되는대로 하루하루를 믿쁨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새로운 삶의 방식에 따른 믿쁨의 신비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순수한 엘성 안에서 믿쁨의 신비를 붙잡는 자라는 사실이 먼저 입증되게 하고, 그 다음에 책망할 것이 없다고 발견되면, 비로소 집사의 직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비블로스의 진리입니다(팀첫 3:9,10). 믿쁨의 비법을 터득하여 실제로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책망할 것이 없다고 발견되어야 집사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수많은 집사들이 있지만, 믿쁨의 신비를 붙잡고 청지기 가치관으로 책망할 것이 없이 살아가는 집사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블로스는 숨 쉬는 진리의 책입니다. 숨과 숨의 소통이 없이는 정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쁨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고 정확히 기록하여야 진리의 책 비블로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족이 믿쁨을 정확히 기록한 비블로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지극히 감사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