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은 '구원'인가 '믿쁨'인가

칼뱅과 루터의 오류 | 에페수스인들(Eph.) 2:8-9

이 문장에서 엘로힘의 선물은 '구원'이 아니라 믿쁨이다. 그리스어와 영어 문법상 믿쁨이 선물의 실체이며, 이는 인간의 신념이 아닌 새생명의 속성이다. 구원을 선물로 본 칼뱅의 예정론과 행위를 부정한 루터의 사상은 비블로스 진리를 가리고 쭉정이 신앙을 낳았다. 자유의지로 말씀을 받아들여 형성된 믿쁨만이 참된 구원의 조건이 된다.

(제임스왕역본)
8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9 Not of works, lest any man should boast.

(안티오키아 비블로스)
8 은혜에 의하여 여러분이 믿쁨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그 믿쁨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엘로힘의 선물이며:
9 행위들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비교해설

개역개정은 구원을 선물로, 안티오키아 비블로스는 믿쁨을 선물로 번역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시대명사(그것 혹은 이것)는 일반적으로 바로 앞의 것을 가리키는데, 그리스어와 영어는 바로 앞이 믿쁨(피스티스, faith)인 반면, 한글번역은 역순이라서 바로 앞에 구원이 오므로 이런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비블로스 용례를 살펴보면 선물은 은사로도 번역되는데, 믿쁨은 은사가 맞지만 구원은 은사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작은 차이가 엄청난 차이로 발전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이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칼뱅의 예정론과 맥을 같이합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에 근거하여 구원은 예정에 따른 선물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 구절이 뒷받침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개역개정은 칼뱅주의(칼빈주의)에 맞게 번역한 셈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무조건적 선물이 아니라 믿쁨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받을 수 있고, 믿쁨은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하여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은혜로 새생명이 주어지는데, 그 새생명의 속성인 미쁨과 나의 믿음이 결합한 믿쁨(faith)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쁨은 나에게서 난 종교적 신념, 신조, 믿음 따위와는 근본 뿌리가 다릅니다. 나의 옛생명이 아닌 새생명에서 난 것이 믿쁨이기 때문입니다.

9절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행위구원의 부정이라는 루터사상과 맥을 같이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루터는 이신득의를 주장하면서 행위를 강조한 야코보스의 일반서신을 지푸라기 서신이라 평가절하했습니다. 하지만 믿쁨(믿음)도 행위이고 행위 없는 믿쁨은 죽은 것이므로 루터의 믿음이 오히려 지푸라기 믿음입니다.

종교개혁의 선봉인 루터나 칼뱅이나 비블로스의 진리에서 빗나갔습니다. 비블로스를 선택(자유의지)하여 받은 새생명과 새생명에서 나온 믿쁨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칼뱅은 예정론으로 교묘히 가려버렸고, 루터는 새생명에서 나온 믿쁨의 행위를 이신득의로 교묘히 부정하여 소위 행위구원 이단정죄의 카테고리 속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새생명의 알멩이가 빠진 쭉정이 신앙을 대량생산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신앙의 열매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빛이 되는 데 실패한 근본 원인과 책임에서 루터와 칼뱅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