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urnt offering 불태운 헌물
내가 크리스토스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불태운 헌물은 제사를 뜻하는 '번제'가 아니라, 옛사람을 완전히 수장시키고 엘로힘의 선물인 믿쁨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비블로스 성취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시사는 밥티스마 성도의 헌신이야말로 창조주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진실한 불태운 헌물의 실체입니다.
노아흐가 주께 희생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날짐승 중에서 취하여, 희생단 위에 불태운 헌물들(burnt offerings)로 드렸습니다. (겐 8:20)
낱말 설명
번제(燔祭)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지만, 번제라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창조주 앞에 나아가 자신을 드릴 때에 요구되는 것이 거룩과 진실인데, 번제를 드린다고 하면 변질된 위조품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거룩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피를 흘려 죄를 대속한 희생(sacrifice)에 기초하여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 헌물(offering)인데, 제사(祭祀)는 귀신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환심을 사는 변질된 종교행위여서 거룩과는 거리가 멀고 진실을 왜곡하였습니다. 더더구나 불로 태웠다(burnt)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어려운 한자인 번(燔)으로 번역하여 소통을 어렵게 한 점도 문제입니다.
한글로 ‘불태운 헌물’이라 번역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불태운 헌물이란 죄인인 옛사람이 완전히 불에 타서 거룩케 되었고, 거룩한 상태로 창조주께 나아가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불태운(burnt)은 불태우다(burn)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입니다. 과거분사는 수동형과 완료형으로서 ‘불태운’은 수동형과 완료형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수동형은 나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며, 완료형은 창조주의 뜻이 성취된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주님의 간청 내용 그대로입니다(맛 26:39). 이것은 십자가의 진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도 파울로스는 십자가의 진리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크리스토스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닌, 오직 크리스토스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며: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그 생활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엘의 아들의 믿쁨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십자가의 진리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형틀로서 죽음을 가리킵니다. 아담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크리스토스의 새생명이 생겼기에, 더 이상 옛생명으로 살지 않고, 새생명의 믿쁨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진리가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비블로스 진리는 믿쁨을 요구합니다. 인간의 믿음과 신조는 흔들리지만, 새생명에서 나온 믿쁨은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신뢰입니다. 믿음은 아담의 생명에서 나왔고, 믿쁨은 예수스의 생명에서 나왔습니다. 미쁘신 예수스의 생명을 믿는 믿음이 바로 믿쁨입니다. 미쁨과 믿음이 결합한 것이 믿쁨인 것입니다. 믿쁨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야 십자가 진리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크리스토스사람이 된 이래로 반백년의 시간 동안 최대의 발견은 단연코 믿쁨의 발견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난 믿음만 알았고, 엘로힘의 선물로 주어진 믿쁨이란 존재 자체를 몰랐습니다.
나의 믿음, 신념, 신조, 신앙 등은 아담의 생명에서 난 신뢰행위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요구하는 믿음 혹은 신앙이란 것도 알고보면 아담의 옛생명에 속한 생명행위이자 신뢰활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조차 아담에 속한 믿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은혜에 의하여 여러분이 믿쁨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그 믿쁨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엘로힘의 선물이며:”(엪 2:8).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Eph 2:8).
이 구절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선물이라고 오해하지만, 지시대명사 that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앞의 faith(믿쁨)이라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닌, 창조주의 선물로서의 faith라 함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나 자신에게서 난 것이란 나 자신이 믿는 행위로서 믿는 것 혹은 믿음이라고 표기합니다. 동사 믿는다(believe)의 명사형은 믿음(believing)이라는 동명사이거나 신조(belief)라는 명사인데, 다 나 자신에게서 난 것으로서 아담의 생명에 속합니다.
엘로힘의 선물은 첫 사람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크리스토스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옛생명이고, 크리스토스의 생명은 새생명입니다. 새생명은 부활의 생명으로서 절대적인 미쁨(trustworthiness)의 속성을 지닙니다. 새생명의 미쁨을 믿는 것을 믿쁨이라 하는데, 미쁨과 믿음이 신비적으로 결합한 것이 믿쁨입니다.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았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믿쁨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았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믿쁨을 통하여 구원받았다 해야 정확합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오직 믿쁨으로 구원받았다 해야 맞습니다.
내 안에 이 믿쁨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구원받은 것이 맞으며, 이 믿쁨에 근거하여 밥티스마를 받으면 밥티스마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불태운 헌물이라는 말의 의미에는 십자가의 진리와 믿쁨의 신비와 밥티스마 성도의 길이 아로새겨 있습니다.
나 자신을 불태운 헌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십자가 진리를 통해 이 믿쁨이 생겼고, 밥티스마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 1월 1일 비블로스 희소식을 듣고 영접기도를 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졌으나, 실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그 후였으리라 봅니다. 비블로스를 자주 접하면서 전적인 신뢰와 함께 비블로스 그대로 성취된다는 믿쁨이 생겨났고, 훗날 그 믿쁨에 근거하여 밥티스마를 받았습니다.
내 안의 착한 엘성(양심)이 반응하는 대로 살다 보니, 비블로스 한글번역을 위해 35년이 넘는 시간들을 다시사게(redeeming the time, Eph. 5:16) 되었고, 그렇게 나의 삶을 불태운 헌물로 드리다 보니, 마침내 2022년 9월 19일에 한글 안티오키아 비블로스 번역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from 시나고그 편지 1호 2023.12.21